생활상식

머리카락의 민속

우현훈 2007. 4. 28. 07:15
전통사회에서는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생명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 자라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체와 동일한 존재 즉 분신(分身) 쯤으로 생각했다. 전쟁터에 나갈라치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기에 손톱과 발톱을 미리 깎아서 가족에게 남겨 두고 떠난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돌아오지 못할 경우 온전한 신체를 대신하여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였다. 어떤 집안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간직하기도 한다. 대개는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담은 주머니를 만들어 관에 넣거나 망자의 소매나 버선 속에 넣어 저승길로 함께 보냈다. 이것들의 재생은 시간이나 공간에 관계없이 계속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단발령에 그토록 저항한 이유도 머리카락에 대한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이러한 가치관도 한몫 했을 것이다. 

 

서구에서도 헤라클레스의 힘의 원천은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리스에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한 두 가닥의 머리카락을 남겨두고 모두 잘라서 간직했다가 성인식 직후에 델포이로 올라가 아폴론 신전에 바쳤다고 한다. 태어난 아이의 신체를 대신하는 신성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남겨둔 머리카락은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장수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기 때문에 줄(線)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마치 아기의 백일이나 돌 때 긴 실을 목에 걸어 줌으로써 수명과 장수를 기원했던 것처럼 탯줄이나 명줄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인간의 수명과 장수를 위협하는 귀신을 물리치는 이른바 축귀의식으로 승화시켰다. 

 

대상과 인간간의 직접적 관계성의 주술에서 벗어나 연상(聯想)주술로 발전시킨 것이다. 앞으로 닥칠지 모를 불행을 자신의 분신인 머리카락을 태워 버림으로써 액(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살아생전에 참빗으로 곱게 빗질한 머리카락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빗접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그 해 마지막 제석날 밤이나 새해 초하룻날 밤에 대문 밖에서 태워버리곤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해의 부정을 막을 수 있고 전염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정월 열 여샛날에 집안에 잡신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머리카락을 태우는 풍습이 있었다. 이날은 다름 아닌 귀신이 오는 날로 여겼기 때문이다. 대보름날에도 그 해 신수가 나쁜 사람은 자기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검은 헝겊에 싸서 3일 동안 문설주에 걸어 두었다가 세 갈래 길에서 태워 버리면 그해 액막이가 된다고 했다. 이 모두 자신의 분신인 머리카락을 통해 신체에 미칠 불행을 사전에 막고자 한 주술적인 축귀(逐鬼)행위였다.

 

머리카락 중에 뱃속머리라 부르는 것이 있다. 배냇머리라고도 하는데 어머니의 뱃속부터 자라 세상에 태어난 후 다시 100일을 더 자란 머리이다. 이 머리카락은 어머니의 모태인 천국과도 같은 신성한 공간과 모든 것을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바깥세상인 세속공간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거쳐 자란 머리이기 때문에 성물(聖物)로 여겼다. 그래서 요즘같이 아무렇게 버리지도, 다루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자식간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끄나풀로 생각해서 영원히 기념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붓(筆)이다. 붓은 전통사회에서 입신양명의 상징적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손잡이 부분인 필간(筆幹)은 가정 형편에 따라 금이나 은, 칠보, 백옥 등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다 아이가 태어난 년, 월, 일, 시의 사주(四柱)를 새겼다. 완벽하게 아이를 대신하는 분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을 장(欌)이나 농(籠) 속 깊은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딸자식이 시집갈 때는 혼수품으로, 아들이면 며느리에게 주어 집안 대대로 대물림하여 기념하도록 했다. 

백일과 돌은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기념일이다. 돈과 금(金)만을 중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예전의 삶의 흔적들은 항상 뭔가 일깨워 준다. 그래서 과거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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